©T1-유리파빌리온내부
 
 
 
 

마포구 서울 월드컵경기장 맞은편에 5개의 석유탱크가 있다. 1973년 석유파동 이후 76~78년에 5개 탱크를 건설해 당시 서울시민이 한 달 정도 소비할 수 있는 양인 6,907만 리터의 석유를 보관했던 이 석유비축기지는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안전상의 이유로 폐쇄됐다. 10년 넘게 방치되어 있던 탱크는 지난 2013년 시민아이디어 공모를 통해 문화비축기지로의 변신을 결정했다. 41년간 일반인의 접근과 이용이 철저히 통제됐던 산업화 시대 유산이 모든 시민이 함께하는 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T3-탱크원형-항공

 

 

 

 

탱크에는 1부터 6까지 숫자가 붙어 있다. 차례대로 둘러봐야 할 것 같지만 순서는 상관없다. T1은 석유비축기지에 원래 존재하던 5개의 탱크 중 가장 작은 탱크였다. 경사면을 따라 올라가는 원래 지형을 활용해 입구를 터널처럼 만들었다. 터널을 따라 걷다 보면 지대는 점점 높아지고, 공간은 점점 넓어진다. 기존 탱크를 해체한 후 남은 콘크리트 옹벽을 이용해 유리 구조물인 벽체와 지붕을 새로이 설치했다. 유리 탱크 안으로 들어서면 탁 트인 공간을 마주할 수 있다. 철골 구조로 지붕을 지탱해 실내에는 기둥을 두지 않았다. 매봉산의 암벽이 유리 벽을 통해 시야에 그대로 들어오는 이곳에서는 눈이 오거나 비가 내리는 날, 모든 불빛이 꺼지고 휘영청 달 밝은 날이 더 기대된다.

 

 

 

 
 

©김리오

 
 
 
 
 

T2 역시 기존 탱크를 해체해 새롭게 조성했다. 기존 탱크는 T6의 외장으로 사용했다. 진입로를 따라 경사로를 올라가면 공연장을 만날 수 있다. 입구부터 자연스럽게 시작하는 오르막 바닥을 이용해 탱크 상부에는 야외 공연장을, 하부에는 실내 공연장을 마련했다. 야외 공연장은 탱크를 감싸고 있던 전면의 옹벽을 그대로 둬 무대 시설의 일부로 활용했다. 구조가 우아하고 시원한 형상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공연자의 음성을 웅장하게 전달하며 친환경 울림통 역할을 한다. 탱크의 뒤쪽은 매봉산의 절개면으로 칡이 암벽을 뒤덮고 있는 풍경이 공연장의 빼어난 배경이 되어준다.

 
 
 
 
 

©김리오

 
 
 
 

T3는 5개의 탱크 중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비축 탱크로, 유일하게 원형 그대로 보존했다. 녹슬어가는 탱크를 감싼 철제 부속물 역시 손대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산화되고 풍화되는 콘크리트 시설물 위로 녹색의 이끼들이 뒤덮고 있다. 이곳은 이용할 수 없는 원형보존공간으로 진입로와 탱크를 잇는 철제 다리가 있지만 접근할 수 없다. T3는 과거를 보존하기 위해 그리고 미래를 위해 개조를 유보했다. 석유 비축 당시의 원형을 최대한 보존해 방문객이 석유비축기지가 세워진 역사적 배경과 경제 상황을 되돌아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인공이 서서히 자연으로 동화되어 가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다.

 
 
 
 
 
 

©김리오

 
 
 

T4는 전시장으로 기획된 탱크다. 하지만 내부를 훤히 밝히는 조명은 없다. 탱크를 활용할 때 건축가는 스스로만의 절대적인 원칙을 세웠다. ‘탱크 자체를 보강하거나 구조물로 사용하지 않을 것.’ 이에 전등을 포함한 일체의 설비도 탱크 자체에 부착하지 않았다. 어둡고 텅 빈 탱크 안으로 가느다란 빛 줄기가 들어오고 기다란 파이프 기둥이 그 빛을 반사한다. 공간은 스스로를 드러낸다. 전시, 퍼포먼스, 워크숍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 가능하나, 이 공간의 무게를 견딜 수 있어야만 작품이 그 빛을 발할 수 있다. T5는 탱크 외부를 빙 둘러 전시 공간으로 구성했다. 상설전시실로 문화비축기지가 탄생한 과정을 한 눈에 볼 수 있게 꾸며놓았다. 탱크 내부는 이 외부 공간의 중정이자 영상실이다. 전시로를 따라가다 보면 외부 공간이 내부가 되고 내부 공간이 다시 외부가 된다. T6는 T1과 T2에서 해체된 철판을 재활용해 다시 조립한 신축 건축물이다. T2는 외틀 옹벽의 외장재로, T1은 안틀 옹벽의 내장재로 삽입했다. 운영사무실, 정보교류실, 강의실, 회의실, 카페테리아 등 커뮤니티 활동을 지원하는 공간이 있다.

 
 
 
 
 

©김리오

 
 
 
 
 

문화비축기지는 많은 이에게 알려진 유명한 전시나 공연을 기획하지 않는다. 대신 아직 가치가 검증되지 않은 것들을 모아 새로운 컨텐츠를 생산한다. 아직 자신만의 전시를 열지 못한 신진 예술가가, 자신만의 컨텐츠를 보여줄 수 있는 일반인이, 모임 공간을 찾는 소규모 동호회가 기지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지난 10월 문화 비축기지가 4년간의 준비를 마치고 공식적으로 문을 열었다. 멈춰있던 기지에 다시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기사 고민주
사진 김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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