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는 것’의 특별한 가치를 재조명하는 대규모 기획 전시

I draw: 그리는 것보다 멋진 건 없어

 

LOCATION: 디뮤지엄

 

 

 

나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직접 말을 하거나 끄적끄적 글을 쓰는 방법이 있고, 요즘은 영상이나 녹음으로 기록을 남길 수도 있다. 그리고 내 생각을 시각적이면서도 다채롭게 표현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리는 것’이다. ‘그리는 것’은 역사 속에서 각 시대의 다양한 면모를 기록하고 기억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각을 시각화하고 개성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어 왔으며, 앞으로도 계속 우리 곁에 있을 것이다. 미디어아트와 같은 디지털화된 시각 이미지로 가득한 현대 사회에서 아날로그적인 감성, 손끝을 통해 탄생한 사람의 온기와 기억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에 디뮤지엄(D MUSEUM)은 대규모 기획 전시 《I draw: 그리는 것보다 멋진 건 없어》를 개최했다. 공감 가는 일상의 이야기, 눈과 카메라가 포착하지 못하는 섬세한 감성을 담아낸 상상과 표현의 도구로서 ‘그리는 것’의 특별한 가치를 재조명할 수 있는 이번 전시에서는 드로잉, 일러스트레이션, 오브제, 애니메이션, 설치 등 350여 점의 작품을 시노그라피, 센토그라피, 사운드를 접목한 공간 기획과 함께 공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한다. 총 6개국 16인의 작가가 참여하는 전시는 작가의 감성에 따라 13개의 옴니버스식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번 전시를 통해 기계문명과 자동화에 익숙해진 우리는 ‘손으로 그리는 것의 의미’와 ‘작가들의 감성’, ‘그림에 대한 취향’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드로잉, 모든 것의 시작 / Drawingscape

전시장은 창문, 정원, 응접실, 박물관 등 참여 작가 16인의 작업 세계에 영감을 준 공감적 모티브를 바탕으로 그려진 개별 전시 공간을 안과 밖으로 거닐며 일상의 장소에 숨겨진 환상의 순간을 펼쳐낸다. 첫 번째 공간은 <드로잉, 모든 것의 시작 / Drawingscape>으로 엄유정 작가의 작업을 만나볼 수 있다. 엄유정 작가는 주변 환경에서 마주친 인상 깊은 장면이나 대상을 드로잉과 페인팅으로 그려낸다. 엄유정 작가의 드로잉은 주변과 인물, 상황과 움직임의 층위가 있는 풍경을 만들어내는 시작점이다. 소재는 아이슬란드의 광활한 설경에서부터 자신에게 감흥을 준 인물들, 동식물, 빵처럼 일상 속 주변을 맴돌고 있는 것들에 이른다. 주로 빠른 시간 안에 완성되는, 단선적이거나 대담하게 화면을 가로지르는 시원한 붓질로 작품 안의 내러티브와 그리는 순간의 심상과 선택을 흥미롭게 엮어낸다. 작가가 주변에서 영감을 얻고 소재를 찾듯, 전시 공간은 자연스럽게 관람객의 시선이 닿는 벽에 작업을 나열하듯 진열해 일상을 관찰하는 느낌으로 구성했다.

 

 

 

낯선 사물을 찾다 / Mysterious Window

<낯선 사물을 찾다 / Mysterious Window>에서는 파리에서 활동하는 피에르 르탕(Pierre Le-Tan)의 작업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십자 긋기(cross-stitch) 화법으로 대상의 형태와 음영을 섬세하게 표현하는 피에르 르탕은 ‘창’을 중요한 오브제로 삼아 작품을 통해 매번 다른 풍경과 낯선 사물을 향해 열려있는 창의 모습을 보여주곤 한다. 작가는 그림을 보는 이들에게 창 밖 풍경의 자리를 내어 주며 작가만의 공간에 관객을 초대하며 신비로운 느낌을 주곤 한다. 작가는 연필과 인디언 잉크, 오래된 구아슈(gouache)만으로 단순하게 작업하는 것을 즐기며, 주로 자신 앞에 있는 오브제나 사진을 관찰하며 그림을 그린다. 전시 공간은 피에르 르탕의 십자 긋기 화법을 공간에 재현한 듯, 벽과 벽이 교차하는 모습이다. 작가가 보는 이들을 작품 속으로 초대하는 것처럼, 벽이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틈을 통해 작품을 관람할 수 있는 전시 구성 또한 관람객이 작품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해준다.

 

 

 

낭만적인 계절을 걷다 / Mellow Forest

오아물 루(Oamul Lu)는 중국의 차세대 일러스트레이터로 주로 자연적인 요소와 인물이 한 화면에 조화롭게 어우러진 따뜻한 그림을 그리는 작가다. <낭만적인 계절을 걷다 / Mellow Forest>에서는 오아물 루 작가의 섬세한 그림 세계를 접할 수 있다. 어렸을 적부터 본인이 좋아하거나 상상한 것을 그대로 표현해 보고자 매일 그림 연습을 해온 작가는 산속 작은 마을에서 성장하면서 자연의 미묘하고 다양한 색에 대한 감각을 키워왔다. 여행을 좋아하는 작가의 그림에는 자신이 방문한 곳에 대한 섬세하고 자유로운 관찰이 담겨있다. 스케치북에 시시각각 변하는 계절의 매력적인 색감과 풍경의 정취를 가득 채우며, 관객들에게 특별한 어딘가로 여행을 떠난 듯한 휴식과 같은 기분을 선사한다. 젊은 작가이니만큼 디지털과 아날로그 페인팅을 혼합해 수많은 빛깔의 자연경관과 그 속에서 노닐거나 사유에 잠긴 인물들을 그리기도 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눈을 깜빡이며 움직이는 gif 그림 작업을 만나볼수 있다.

 

 

 

상상 속에 가두다 / Inner Garden

몽환적이고 깊은 향취와 함께 어두운 조명 속을 거닐며 오직 작품에만 집중할 수 있는 네 번째 전시 공간은 런던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언스킬드 워커(Unskilled Worker) 작가의 작업이 전시된 <상상 속에 가두다 / Inner Garden>이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독학으로 그림을 시작한 작가는 SNS를 통해 큰 인기를 얻으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작가의 작업은 보는 이로 하여금 암울한 시대를 환기시키는 동시에 순수한 어린아이의 세계로 초대받는 듯한 묘한 감정을 일으킨다. 그림 속 인물들은 커다랗고 깊은 눈동자로 관객을 응시한다. 그들의 시선은 순수하고 연약했던 작가의 유년시절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고, 주변에 공감하는 성인이 된 작가가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기도 하다. 2014년에는 세계적인 포토그래퍼 닉 나이트(Nick Knight)가 작가의 작업에 관심을 가지며 알렉산더 맥퀸(Alexander McQueen)의 대표 의상을 위한 초상화 시리즈를 의뢰하기도 했다. 또한, 『하퍼스 바자 아트Harper’s Bazaar Art』가 선정한 7인의 주요 여성 현대 미술가 중 한 명으로 선정되어 매거진 커버를 그녀의 작품으로 장식한 바 있다.

 

I don't see the characters' stares as vacant - rather, I see my figures as trapped, which is exaggerated
though their eyes. It's as if they know that they are in a painting, trapped within its frame.
-UNSKILLED WORKER-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 Blind Love

여성이 중심인물로 등장해 주변 인물이나 그를 둘러싼 세계와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을 그리는 크리스텔 로데이아(Kristelle Rodeia) 작가는 프랑스 출신의 일러스트레이터다. 연필이나 잉크를 사용해 세밀한 밑그림을 그린 후 디지털로 채색해 사실적인 묘사를 완성하며, 작품 속에는 여성의 순수함과 아름다움, 연약함과 묘한 잔혹성, 경쾌함과 유머가 어우러져 있다. 이번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 Blind Love> 에서는 굽이치듯 유연한 벽을 넘어 한쪽 벽면 전체를 작품으로 아우르고 있는 전시 구성을 보여준다. 작업을 세밀히 살펴보면, 여성이 자신의 자아와 교감하는 듯한 장면이나 이성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다양한 사랑의 얼굴을 비유적으로, 때로는 잔혹한 느낌으로 표현한다.

 

 

 

판타지의 문턱을 넘어서다 / Super Realistic World

하지마 소라야마(Hajime Sorayama)는 40여 년 동안 메탈을 소재로 다양한 로봇 일러스트레이션과 조각을 선보여왔다. 그런 그의 작업을 볼 수 있는 <판타지의 문턱을 넘어서다 / Super Realistic World>는 오랜 시간 그려온 그의 공상과학적 이미지를 담고 있다. 메탈의 물성에 빠져 여성 휴머노이드를 그려온 작가는 자신의 일러스트레이션 스타일에 대해 슈퍼리얼리즘(superrealism)이라 명명했으며, 에어브러시 페인팅 기법을 이용해 정교한 여성 로봇을 표현하면서 다양한 대중문화 컨텐츠로써 기계적 판타지의 서막을 열었다. 전시장에서는 그림 작품부터 커다란 전시 조형 작품까지 만나볼 수 있으며, 메탈의 특성을 더욱 강조할 수 있는 하얀 벽과 눈부신 천장 조명이 인상적이다. 작가는 로봇의 실제감을 강조하기 위해 메탈 신체에 반사되는 색으로 땅을 의미하는 갈색과 하늘을 의미하는 파란색을 선택해 자연스러운 인식을 유도했으며, 디뮤지엄은 이에 상응하듯 작가가 그려온 판타지, 공상과학적 이미지를 그대로 녹여낼 수 있는 전시 공간을 기획했다.

 

 

 

 

유리 장미, 소라, 별, 어젯밤 / Glowing Bed

<유리 장미, 소라, 별, 어젯밤 / Glowing Bed>에는 서울에서 활동하는 일러스트레이터이자 만화가 람한(Ram Han) 작가의 신작 및 작업이 전시되어 있다. 개인적인 서사가 뒤얽힌 초현실주의적 분위기를 그리는 작가는 그림을 통해 자신의 기억 속에 자리한 향수를 시각화하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이에 가상 공간을 만들어 다양한 사물들과 노스텔지아를 일으키는 과거의 단편들이 한 곳에서 만나 몽환적인 분위기를 발산하는 작업을 선보인다. 자칫 복잡한 듯하지만, 작품 속 물건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일만한 스토리가 담겨 있어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감수성을 자극한다. 또한, 작가의 작품은 화면 안의 인물, 공간, 사물의 형태와 관계에 관심을 돌리게 하는 사이키델릭하면서도 흡입력 있는 색의 사용과 연출을 특징으로 한다. 계단에서부터 새로운 전시의 입구까지 이어진, 입체적이고 역동적인 7번째 전시 공간은 람한 작가의 신비롭고 초현실적인 작품 분위기를 더욱 고취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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