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가쁜 서울의 시간, 그 속도에 지칠 때면 옛길을 찾자.
옛길에선 시간마저 천천히 흐른다.
느리게 흐르는 시간은 천천히 걸어야 느낄 수 있다.








덕수궁 돌담길. 의외의 걸음을 걷다.
 
덕수궁 돌담길을 걷는 것이 언제부터 낭만적인 일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고즈넉한 분위기의 돌담과 가로수, 그 담과 가로수가 만들어내는 그늘, 천천히 굽은 길을 걷는 정취는 누구에게나 비슷한 서정을 부른다. 오래된 돌담 아래를 걷는 연인의 마주 잡은 손은 낭만적이고, 군데군데 벤치에 앉아 가로수 그늘을 누리는 직장인들의 휴식은 여유로우며, 뜨거운 햇살을 맞으며 걷는 이들의 이야기 소리는 심지어 목가적이다. 익숙한 덕수궁 돌담길이지만 오늘은 왠지 다르게 걷고 싶었다.
 
점심시간, 쏟아져 나온 직장인들이 빠르게 길을 재촉한다. 여유롭게 산책을 즐겨도 괜찮을 텐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쫓기듯 잰걸음을 걷는다. 오래 묵은 돌담이 만들어내는 그늘과 그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 한 뼘 한 뼘 시시각각 변하는 담 자체의 질감과 비스듬한 풍경을 즐기기에 서울의 걸음은 너무 빠르다. 모든 길에는 길이 안내하는 속도가 있다. 덕수궁 돌담길이 안내하는 속도는 서울보다 느리다. 오늘은 길이 안내하는 대로 느리게 걷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돌담길을 지나 정동극장, 경향신문이 있는 방향으로 간다. 느리게 걷기 위해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길로 향했다. 돌담길을 따라 덕수궁을 한 바퀴 돌기로 했지만 길은 도중에 허리가 뚝 끊겨버렸다. 영국대사관이 1884년 부지를 사들인 이래로, 이 길을 따라 덕수궁을 도는 건 할 수 없는 일이 됐다. 그렇게 130년이 지났고 우리에겐 이 끊어진 부분에 대한 기억이 없다. 길을 막아선 철문이 높다.
 
다행히도 덕수궁 돌담길이 조만간 온전한 모습으로 돌아올 예정이란 소식이 들린다. 서울시가 영국대사관과 끈질기게 협의한 결과라고 한다. 170m의 길이 다시 일반에 공개될 것이다. 곧 우리는 살아서 이 길을 온전히 걸을 수 있다. 그리하여 걸어본 적 없는 길에 대한 기억을 이제야 다시 아이들에게 남길 수 있게 되었다. 끊어진 길이 열리면 꼭 이 길을 찾아 걸어보자. 19세기에 잃어버린 이 길을 비로소 반갑게 되찾아 걸어보자.










성공회 대성당, 담대한 유산
 
발걸음을 물려 길의 반대쪽으로 돌아갔다. 한 성당이 돌담길의 다른 끝에 있다. 성당의 원래 이름은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이지만 보통 성공회 대성당이라 불린다. 많은 이들이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서 있는 이 성당을 잘 알고 있지만 의외로 이 성당을 직접 찾는 이들은 적다. 주변에 많은 볼거리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성당이 돌담길과 너무 잘 어울려 눈에 잘 띄지 않기 때문이다.
 
설계자의 세심한 안배 덕분에 서양식 건물인 성당은 주변의 고궁, 한옥과 이질감이 없다. 보통 성당이나 교회는 하늘을 찌를 기세로 뾰족한 첨탑을 세운다. 하지만 성공회 대성당은 주변 풍경에 위해를 주지 않고 오히려 풍경에 자연스레 동화한다. 이 동화는 성당이 풍경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방식이다. 처마 장식에 또 기와지붕에 그 배려와 애정이 자연스레 묻어난다. 이웃과 친구를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을 건축적으로 표현한다면 이런 모습일까.
 
우아한 한식 기와와 은은한 스테인드글라스는 성당의 자태를 유려하게 만든다. 반면 밝은 화강암과 붉은 벽돌을 단단하게 쌓아 올린 건물은 꿋꿋하고 듬직하다. 성당 옆에는 뜬금없는 한옥건물이 있다. 경운궁 양이재라는 이름의 이 건물은 원래 황족과 귀족자제들을 교육하는 궁 안에 있던 수학원이었다. 그랬던 것을 일제강점기 대한성공회가 건물을 통째로 사들여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성당 옆에 서 있는 양이재는 일제가 갈기갈기 쪼개어 팔아버린 대한제국의 유산이다.
 
1905년에 세워진 양이재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냉난방 시설을 가동하는 것조차  번거로운 절차를 거쳐야 하지만 성당은 양이재를 살려두었다. 건물은 사람이 들어가 쓰지 않으면 금세 수명을 다하고야 만다. 그렇게 이 땅의 많은 고택과 고적, 고목이 불편하고 촌스럽다는 이유로 사라져 갔다. 수백 년이 넘는 목조건물들이 아직도 건재한 것은 사람이 계속 사용하기 때문이다. 양이재는 지금 대한성공회 서울교구의 사무실로 쓰이고 있다. 양이재가 아직 살아있는 것은 성당과 성당 사람들이 불편을 참고 사용한 덕분이다.














중명전, 비극의 테라스
 
정동극장과 미국대사관저, 예원학교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중명전이 있다. 정동극장 옆 조그만 골목으로 들어서야 나오는 중명전은 정동길을 많이 다니는 이들 중에서도 잘 모르는 이들이 많다. 한때는 왕의 거처로도 쓰였던 중요한 곳이다. 1897년 처음에는 황실 도서관으로 쓰이다 1904년 덕수궁 화제 이후에는 고종이 거처로 사용했다. 황실 도서관으로 쓰기 위해 서양식 전각인 중명전을 지은 것은 근대문물 수용에 앞장섰던 고종의 의지였다. 고종은 이곳에서 마시는 커피를 즐겼다.
 
고종의 의지와는 다르게 중명전에는 아픈 역사가 많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이곳에서 체결되었다. 이 협약의 결과로 대한제국은 명목상의 보호국, 실질적으로는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 고종이 그 협약의 불법성과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1907년 헤이그 특사로 이준 등을 파견한 것도 이곳 중명전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이후 일제는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켰다. 12년 후인 1919년 고종은 대한제국의 황제가 아닌 일본제국의 이태왕(李太王)으로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건물을 지나간 이야기만큼 건물의 이야기도 많지만 지금 중명전에서 그 아픔을 느끼긴 어렵다. 중명전은 다락방이 있는 2층 규모의 벽돌로 지은 서양식 건물이다. 아치 장식과 페디먼트 등 러시아 르네상스 건축적 특징을 보인다. 특히 건물 외부 3면에 있는 테라스가 아늑하다. 고종은 중명전을 거처로 쓰기 전에는 집무실로 쓰기도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커피 마니아였던 고종은 이 테라스에서 대신들이나 외국 손님들과 커피를 즐겨 마셨다. 그가 아직 대한제국의 황제였을 때의 일이다.
 
중명전의 설계자인 러시아 건축가 사바찐(A. I. Sabatin)은 개화기 조선의 근대 건축물에 큰 영향을 줬다. 그는 1883년부터 러일전쟁으로 한국을 떠나기 전까지 22년간 건축분야에서 많은 자취를 남겼다. 러시아, 프랑스 등 외국 공사관과 손탁호텔, 명동성당, 러시아정교회성당의 설계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특히 그가 남긴 독립문과 중명전은 우리나라 근대 건축 역사의 중요한 한 페이지를 차지한다. 어쩌면 건축사뿐만 아니라 근대사 그 자체이기도 하다. 사바찐은 러일전쟁으로 한국을 떠난 이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했다고 한다. 블라디보스토크는 한국과 가장 가까운 도시이다.
 
매일 보던 집 앞의 벚꽃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기억나지 않는 것은 한 번도 거기서 걸음을 멈추어 선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 계절의 아름다움을 기억해내려면 반드시 잠시 멈춰야 한다. 덕수궁 돌담길 주변,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았던, 가지 않던 곳을 천천히 돌담길만큼 느리게 걸었다. 느린 서울이 좋았다.

기사 노일영
사진 여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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