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명품 브랜드이자 보테가 베네타, 이브 생로랑, 발렌시아가, 알렉산더 맥퀸 등을 소유한 케링 그룹의 자회사, 구찌(GUCCI). 한때는 절제된 이미지가 고루하다는 비판을 받으며 타격을 받았지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알렉산드로 미켈레의 지휘 아래 브랜드는 새롭게 태어난다. 이후 규칙도, 성도, 시대도 없는 디자인을 선보이며 구찌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그런 구찌가 2020년 5월 6일부터 7월 12일까지 대림미술관에서 멀티 레이어(Multi-layered) 프로젝트를 연다. 이번 전시는 서울의 다채로운 문화 경관과 현대 미술을 지원하기 위한 문화지원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서울의 독립 및 대안 예술 공간의 복합적인 역사와 헤테로토피아(Eterotopia)에 대한 디렉터의 고찰에서 영감을 받아 기획되었다. 전시는 다른 공간(Other Space)에 대해 개인이 타인 혹은 주변 환경과 관계를 맺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한다.
 

 

 

 

이번 전시의 제목은 이 공간, 그 장소: 헤테로토피아(No Space, Just a Place, Eterotopia)다. 전시의 모든 프로젝트들은 내러티브를 새롭게 만들고, 마이너리티를 이해하는 것, 즉 소수자의 정체성과 퀴어 문화를 탐색할 수 있는 유토피아적 대안을 꿈꾼다. 특히 불확실성이 가득한 지금 이 순간, 자신의 환경 속에서 대안적인 존재와 소비의 방식에 대한 성찰이 요구되고 있다. 이번 전시는 그런 요구에 대해 GUCCI가 내놓은 대답이다

 

 

대림미술관 첫 층에서 우리는 한 세탁소를 만나게 된다. 한 쪽에는 벤치가 있고, 양 벽면에는 세탁기가 가득 메우고 있다. 그냥 세탁기는 아니다. 세탁기 속에는 인어들의 꼬리가 보인다. 이곳은 올리비아 에르랭어(Olivia Erlanger)의 작품 ‘Ida, Ida, Ida!’ 속. 이 인어들은 세탁기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인지, 빠져 나오고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세탁소란 집에 세탁기와 건조기가 있다면 결코 방문할 필요가 없는 장소다. 이곳의 인어들에게는 성별이 없다. 작가는 이들이 환경에 따라 모습이 변하는 초현실적 존재라 말한다. 인어, 세이렌, 메두사처럼 말이다. 동화 속 장면들 때문에 우리는 이들을 여성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글쎄. 그것은 그저 고정관념일 뿐이다.
 

 

 

2층 첫 전시공간은 화이트노이즈(White Noise)와 탈영역 우정국(Post Territory Ujeongguk)이 꾸몄다. 국내외에서 분야와 장르의 구분 없이 활발하게 아트 이벤트를 기획하고 주최하는 화이트노이즈는 이번 전시에 프로젝트 ‘장수의 비결’을 소개했다. 화이트노이즈에서 활동해온 창작자 여덟 명을 새롭게 구성한 네 팀의 결과물이다.
 

 

 

 

일층에서 이층으로 올라가면 계단 옆에 이강승 작가의 작업이 보인다. 작품의 이름은 ‘QueerArch.’ 작가는 1,700여종의 책과 잡지로 작품을 구성했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주류의 역사에서 베재되었던 성소수자의 역사에 주목한다. 2층의 작은 방에는 한 트랜스젠더 여성의 일기를 그림으로 옮긴 작업을 볼 수 있다. 그의 일기에서 우리는 삶에 베여 작품 안에 녹아든 역경, 자기혐오, 희망을 목격하게 된다.
 

 

 

한 층 계단을 올라가면 독립공간 OF의 프로젝트 Room을 만나볼 수 있다. OF는 그들에게 주어진 공간을 세 개의 방으로 분리, 다양한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재밌는 점은 이현종 작가의 영상과 다른 영상의 사운드가 제각기 뒤바뀐 채 송출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김동준 작가, 임소은 작가, 허지혜 작가 등의 작품도 주목할만하다. 세 개의 방에는 아티스트의 작업이 가구처럼 배치되어 있다. 각 방들은 구분되어 있는데, 관객은 각 분리된 공간에서 작품과 오롯이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취미가가 꾸민 ‘취미관 대림점’은 40명 이상의 아티스트들이 참여한 작품들을 진열장 너머로 만나볼 수 있는 공간이다. 빽빽한 유리 진열장 속에는 생소하고 친숙하며, 갖고 싶었던 물건들이 놓여 있다. 이번 전시에서 취미가는 판매와 구매의 개념을 도입했다. 작품들을 살펴보면 작품들 옆에 이름과 가격이 함께 쓰여 있는 표를 목격하게 된다. 우리가 흔히 미술품 경매 소식을 들을 때도 어떤 작품이 엄청난 가격에 팔렸다는 사실은 알게 되지만, 그 가격이 왜 붙었는지는 모른다. 취미가는 우리에게 이런 숫자에 현혹되지 말고, 작품 자체가 가진 가치에 주목해보자고 이야기한다.
 

 

 

통의동 보안여관은 ‘사이키델릭 네이처: 나타샤와 두 개의 노란 조각’이라는 2019년 보안여관의 전시를 재구성했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환영이 만들어낸 인공 낙원을 다루던 이들은 세계의 안쪽을 이루는 인물과 사물에 주목한다. 류성실이 창조한 ‘칭첸’의 세계는 환영과 현실, 전통과 미래의 경계가 불명확하다. ‘칭첸 투어’의 주요한 감각적 대상은 여행지의 이국적 정취가 아니라 그 세계를 만들고 있는 미신과 신화다. 최하늘이 만들어낸 두 조각은 오브제가 지닌 형식과 구성 자체를 통해 그 의미를 드러내는데, 이번 작업에서 그는 서로 상반되는 성적 지향을 가진 이들을 표현한 조각과 사진을 선보였다.
 

 

 

시청각(AVP)의 프로젝트는 흥미롭다. 이번 전시에서 이들은 지난 기획을 새롭게 바라보는 프로젝트 AVP Route를 선보인다. 이 프로젝트는 시청각이 기획했던 두 전시를 합쳐 놓은 것이다. AVP Route를 통해 도면함과 무브 앤 스케일에 참여했던 박미나,Sasa, 윤지영, 장금형 작가 등의 작업물을 만나볼 수 있다.

 

 
공간의 4층, 자칫 발을 잘못 내딛으면 떨어지기라도 할 것 같은 곳, 세실 B. 에반스의 작품이 상영되고 있다. 작가는 인간과 기계의 상호작용에 대해 탐구하고 탐색한다. 인터넷의 종말 후 세상을 가정해 시스템인 HYPER의 시선을 따라가며 전개되는 한 편의 이야기를 보고 나면, 우리는 이번 <이 공간, 그 장소: 헤테로토피아(No Space, Just a Place, Eterotopia)> 전시의 모든 공간을 다 만나게 된다.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전시인만큼, 전시장을 나서는 발걸음이 마냥 가볍지만은 않았다. 이곳에서 당신이 주최 측이 의도한대로 대안적인 세계를 만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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